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패트릭 유잉 (문단 편집) ==== 충격적인 이적, 그리고 쓸쓸한 은퇴 ==== 2000-01 시즌을 얼마 앞두지 않은 9월말, 닉스의 GM인 스캇 레이든[* 그야말로 닉스에게 잃어버린 10년을 안겨준 악의 축 2인 중 1명. [[뉴욕 닉스]] 항목을 참조.]이 충격적인 소식을 발표한다. 패트릭 유잉을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트레이드 시켜버린 것이다![* 뉴욕 닉스,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시애틀 슈퍼소닉스, 피닉스 선즈 4팀이 연루되어 픽까지 포함하면 16명씩이나 움직인 초대형 트레이드였다. 뉴욕은 유잉과 백업 센터 크리스 더들리를 보내고 그 댓가로 글렌 라이스, 트레비스 나이트, 룩 롱리, 버논 멕스웰, 라자로 보렐, 블라디미르 스테파이나에 미래의 1라운드 픽 2개와 2라운드 픽 2개를 포함 무려 10명의 선수를 받아왔다. 하지만 이 중에 제대로 쓸 수 있었던 선수는 글렌 라이스 하나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트윈 테러와 포지션이 중복되어 식스맨으로밖에 활용하지 못했고, 거기에다 꼴랑 1시즌만 뛰고 휴스턴 로키츠로 트레이드되어 떠났다. 리빌딩을 명목으로 받아온 1라운드 픽 2개는 한 시즌도 참지 못하고 이미 전성기가 지난 마크 잭슨과 롤플레이어에 불과했던 오델라 헤링턴이랑 바꿔먹어버려 결론적으로 스캇 레이든이 유잉을 트레이드한 명분 자체에 스스로 먹칠을 한 셈이 되었다.] 15년이란 세월을 한결같이 뛰어온 프랜차이즈 플레이어를 리빌딩이라는 명목으로 헌신짝처럼 버려버린 이 결정에 팬들은 분노하였고, 유잉은 그렇게 정든 팀을 떠나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주전 센터로 새 시즌을 맞게 되었다. 당시 시애틀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샤킬 오닐에 맞서 인사이드를 지켜줄 센터를 절실히 원했고 그 결과 유잉을 얻는 데 성공했지만, 유잉은 노쇠화와 부상 후유증 덕택에 제한적인 플레잉 타임만을 소화할 수 밖에 없어 기대한 만큼의 활약은 해 주지 못했다. 나이에 따른 기량 저하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15년을 헌신적으로 뛰어온 친정팀으로부터 버려졌다는 마음의 상처가 내성적인 성격의 유잉에게는 그의 얼마 남지 않은 기량마저 좀먹는 요소였으리라. 그러나 한국팬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유잉이 트레이드된 것은 '''본인의 의사'''였다. 주된 사유는 많은 나이로 인해 더 이상 팀에 보탬이 되기 힘든데다, 시간이 갈수록 극성맞은 뉴욕 언론의 비판속에서 계속 우승 도전에 실패하면서 심적으로 힘들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트레이드 당시 기사를 보면 [[https://nypost.com/2001/12/09/why-ewing-wanted-out-of-new-york/amp/|#]] 위에 언급된 유잉 무용론을 포함해 온갖 말도 안되는 비난에 질린 유잉이 2000시즌 중반에 트레이드를 요구했다고 한다. 당시 팀은 "시즌 종료될 때까지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트레이드 시켜주겠다"고 약속했고, 시즌이 끝나고 트레이드 시킨 것. 또한 유잉은 2016년에 [[https://www.foxsports.com/nba/story/patrick-ewing-new-york-knicks-trade-033016|Fox Sports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당시 팀동료들로부터 "유잉이 없는게 낫다"는 뒷얘기가 나와 질린 나머지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전했다. 즉, 사실 스캇 레이든과 뉴욕 프런트는 '''그를 트레이드하려고 한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대체할 센터가 없었던 닉스는 유잉의 요구에 난색을 표했다. 이를 잘 알 수 있는게 이때 트레이드를 보면 닉스는 뭔가 많이 받아오긴 했지만 기껏 제대로 받아온 건 전성기가 한참 지난 스윙맨 글렌 라이스였고 나머지는 즉시전력으로 활용하기 힘든 선수들에 당장은 쓰지도 못할 다수의 1, 2라운드 픽 뿐이었다. 심지어 라이스는 당시 트윈테러가 있던 뉴욕 입장에서 꼭 필요한 선수도 아니었다. 게다가 유잉이 당시 과한 연봉을 받고 있었다고는 하나 고작 1년만 지나면 만기가 되는 상황이었다. 즉, 닉스 입장에서 저딴 매물들을 받고 프랜차이즈 스타를 팔아버렸다는 것만 봐도 이 트레이드의 주요 목적이 오직 급하게 유잉을 보내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담이지만 유잉은 트레이드를 요구한 걸 나중에 후회했다고 한다. 이 시즌이 끝나고 FA가 된 유잉은 [[올랜도 매직]]과 2년 계약을 맺었다. 이미 [[그랜트 힐]]이 33번을 달고 있어 본인은 3+3이자 드림팀 1당시의 배번인 6번을 달고 활약했다.[* 그래도 올랜도 매직이 나름 유잉에 대한 예우를 해준 것이 올랜도 매직의 6번은 팬들에 대한 헌정의 의미로 영구결번된 번호였는데 유잉을 영입하며 일시적으로 영구결번을 해제하고 유잉에게 6번을 줬다. 현재까지도 유잉은 올랜도 매직 역사상 6번을 달고 뛴 유일한 선수다.] 비록 전성기의 실력은 완전히 잃어버린 그였지만, 데뷔 후 커리어 최초로 백업 센터의 역할을 수행하며 온전히 팀에 헌신하였고 가끔씩 전성기의 실력을 뽐내며 팀의 극적인 승리를 이끌기도 해 클래스가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2001-02 시즌 종료 후 계약기간이 1년 남았지만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이 시즌에 가졌던 마지막 닉스 경기에서 닉스 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기도 했다. (닉스는 플레이오프 탈락했기 때문에 이는 유잉이 MSG에서 갖는 생애 마지막 경기였다) 감독이자 한때 유잉의 닉스 동료이기도 했던 닥 리버스는 레전드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를 주전 센터로 출장시켰으며(3개월만에 처음이었고 이 시즌 그가 주전으로 나온 4경기 중 하나였다) 주전 라이업 소개 당시 팬들이 그를 기립박수로 맞아주었다. 유잉은 점프볼을 따내고 첫 득점을 하는 등 6점 5리바운드(야투 2/3)으로 팀승리에 기여했다. 승부가 결정된 이후 55초를 남겨두고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화와 함께 투입되어 MSG에서 마지막 슛을 날렸는데, 이게 아깝게 빗나가자 당시 닉스 가드였던 마크 잭슨은 "솔직히 들어갔으면 했다"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잭슨은 유잉의 2년 후배로 닉스가 초창기에 한창 성장할 때 유잉과 찰떡 호흡을 자랑했던 포인트가드였다.] 만족할만한 선수 생활을 보냈지만 우승과 챔피언 반지를 획득하지 못한 것만은 정말 아쉽다는 소감을 남겼다. 은퇴 직후 [[마이클 조던|그 분]]이 계신 워싱턴 위저즈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임명되었으며, 2003년 2월 28일 뉴욕 닉스의 홈경기에서 공식 은퇴식과 함께 그의 배번 33번이 영구결번되었다. 그의 마지막 인사는 "I always will be a knick, I always will be a New Yorker. Thank you very much." [[파일:external/media.tumblr.com/tumblr_m0kw5vBawq1qeaqak.jpg]] 뉴욕의 심장 유잉이 은퇴 직전 타향살이 중에 만난 [[휴스턴 로키츠]]의 레전드 [[하킴 올라주원]]과 펼치는 대결 한 컷.[* 이 당시 라이벌이었던 올라주원 역시 휴스턴과 계약 실패로 [[토론토 랩터스]]로 이적했는데, 휴스턴 팬들 또한 팀의 레전드가 이렇게 떠나버린 것에 대해 엄청나게 분노했었다. 뭐 그나마 올라주원은 기대보다 낮은 금액에 자기가 튕긴 거긴 했지만... 유잉 역시 본인의 의사대로 트레이드 된 것이다. 올라주원과 마찬가지 상황.]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